1. 일본의 조선 문화재 관리 정책과 박물관 설립
일본은 19세기 말부터 조선의 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는 조선의 문화적 가치를 보존하려는 목적보다는 식민 통치를 위한 기반을 다지고, 체계적으로 문화재를 관리하려는 의도가 더 컸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조선의 역사적 유산을 조사·수집하여 이를 일본의 역사 서술과 식민 통치 정당화의 근거로 활용하려 했다. 이에 따라 조선 내에서 다양한 박물관이 설립되었으며, 왕실 소유의 유물을 정리하고, 일본 학자들이 고고학적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화재가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2. 이왕가박물관과 이왕가미술관
이왕가박물관 설립과 운영
1907년 고종 황제가 퇴위하고,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동하면서, 덕수궁 일부를 박물관으로 활용하는 계획이 논의되었다. 1908년 동물원과 식물원을 포함한 박물관 설립이 추진되었으며, 조선 왕실이 보유한 미술품과 공예품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1911년 창경궁 내에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이 설립되었으며, 조선 왕실이 소유한 도자기, 회화, 불교 조각, 금속 공예품 등이 전시되었다. 이어서 1915년에는 경복궁 내 별도의 전시 공간에서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이 개관되었다.
이 박물관들은 조선 왕실 유물을 보호하고 전시하기 위한 목적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조선의 문화유산을 일본이 직접 관리하고 연구하는 체계로 편입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3.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개관과 운영
경복궁 박람회와 박물관 설립
1915년, 일본은 조선총독부의 통치 5주년을 기념하여 경복궁에서 물산공진회(物産共進會)를 개최했다. 이 행사는 일본이 조선의 문화를 연구하고 관리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한 선전 활동이었다. 근정전에서 이를 개최한 이래로 10월 31일까지 약 160만명의 관람자가 방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박람회 이후, 일본은 조선의 역사적 유산을 공식적으로 관리한다는 명목하에 같은 해 조선총독부박물관(朝鮮總督府博物館)을 개관했다. 이 박물관은 조선의 역사적 유물을 보존하고 연구하는 공간으로 기능했으나, 실제로는 일본으로의 문화재 반출을 용이하게 만드는 창구 역할을 했다.
박물관 전시 구성
조선총독부박물관은 여러 층으로 구성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주요 유물을 전시했다.
- 1층: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유물, 고려·조선시대 도자기 및 금속 공예품
- 2층: 선사시대 유물, 낙랑 및 대방 시대 유물, 조선 시대 회화 및 벽화 모사도
이외에도 궁궐 내 여러 전각을 이용해 불교 조각, 석조 유물, 기와 및 벽돌 유물, 중앙아시아 출토품 등이 전시되었다. 그러나 시설이 협소하여 충분한 전시 공간을 확보하기 어려웠으며, 일부 전각은 재정 부족으로 폐쇄되었다.
4. 일본의 고고학 조사와 문화재 반출
고적 조사와 연구 활동
1916년, 조선총독부는 고적급유물보존규칙(古蹟及遺物保存規則)을 제정하여 조선의 문화재를 관리하는 체계를 마련했다. 이 체계는 조사를 일반과 특별로 나눔으로써 필요하다고 인정되거나 긴급을 요하는 경우에 조선의 유적 발굴 조사를 용이하게 하였다. 이를 통해 전국적으로 고분, 사찰, 선사 유적, 사적지, 고건축물 등이 조사 대상에 포함되었으며, 조사된 유물은 대부분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이송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6년 고적조사위원회(古蹟調査委員會)를 구성하여 본격적인 발굴 작업을 진행했으며, 일본 학자들이 조선 내 유적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문화재 반출이 이루어졌다.
일본 학자들의 연구와 문화재 반출
1902년부터 일본 학자들은 조선의 주요 유적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조선 내 고건축 조사 진행
- 야기 사부로(八木三郎), 시바타 쓰네요시(柴田常惠): 경주 및 김해 지역 고분 발굴
- 이마니시 류(今西龍): 가야 지방의 고분 조사
1914년부터는 조선총독부가 직접 한국 전역의 문화재 조사를 주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15책이 간행되었다.
특히, 1921년 경주 금관총 발굴 이후 일본 학자들은 조선 전역에서 고분 발굴 작업을 활발히 진행했다.
- 1926~1928년: 황남리 고분군, 서봉총 발굴
- 1920년: 양산 부부총 발굴
- 1921년: 부산 영도패총 조사
- 1926년: 함북 웅기패총 발굴
이 과정에서 수많은 문화재가 일본으로 반출되었으며, 많은 유물이 일본의 주요 박물관에 보관되었다.
이렇듯 한국의 유물 발굴을 일본 고고학자들이 수월하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반도에서의 발굴은 식민 정책으로 인해 어려움 없이 진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금관총의 발견으로 낙랑 지방의 도굴 현상이 심화되어 1923년과 1924년에 고분 수백기가 파손되었다. 이를 막기 위해 조사를 적극적으로 시행하게 되어 낙랑과 경주의 유물이 다량 발견되게 되었다.
5. 결론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은 조선의 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박물관을 통해 이를 관리하려는 정책을 추진했다. 조선의 주요 박물관들은 일본의 통제 아래 운영되었으며, 일본 학자들은 체계적인 발굴 작업을 통해 조선의 문화재를 연구하는 동시에 상당수를 일본으로 반출했다.
이러한 조치는 표면적으로는 문화 보존을 위한 것처럼 보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조선의 역사를 일본 중심의 역사 해석으로 편입시키고, 문화재를 통제하려는 의도가 강했다. 현재도 많은 한국의 문화재가 일본의 박물관과 연구소에 보관되어 있으며, 반환되지 않은 사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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